L'appartement..
도시 속의 세 가지 사랑
- ‘라빠르망(L'appartement)’을 보고...
몇 년 전부터 내 방 한쪽 면을 차지하고 있는 영화 포스터가 하나 있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세 사람... 영화 ‘라빠르망(L'appartement)’의 포스터다. 이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포스터 자체를
참 좋아해서 이사를 갈 때면 내가 가지고 있는 CD, LP, 비디오와 함께 가장 먼저 꼼꼼히 포장하는
내 재산목록 1호이기도 하다.
제목은 불어로 apartment를 뜻하는데 이 ‘아파트’라는 형태의 건물들이야말로 오늘날의 ‘도시’를
특징지우는 것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오랜 세월을 아파트에서 살고 있지만, 가끔 엉뚱한 상상을 해 볼 때가 있다. 아파트의 단면을
잘라낸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자. 내가 밥을 먹는 위아래에서 다른 사람들 또한 밥을 먹고 있고, 내가
볼일을 보는 위아래에서 역시 볼일을 보고 있을 것이다. 무척이나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아닌가? 그리
두껍지 않은 벽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최대한 네 가정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대부분 그들을 모른다.
가장 가까이 수많은 사람들이 맞닿아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 가장 유리되어 있는 공간... 그러한 모순의
공간이 바로 ‘아파트’이며,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일 것이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사랑’에 있어서도 그러한 모순을 발견하곤 한다. 영화는 그렇게 가까이
있었음에도 깨닫지 못했던 안타까운 사랑을 그리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오르는 신경숙씨의 소설 구절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등만 바라보며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그의 등을 바라보며 아파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나의 등을 바라보며 아파하고 있지 않았을까?’
이웃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알지 못하는, 관심도 없는 아파트의 생활에 익숙해진 우리들. 혹시 나의 등을
바라보고 있는 진실한 사랑을 깨닫지 못한 채 다른 이의 등만을 바라보며 마음 아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해외출장을 앞두고 약혼녀와 함께 잠시 들린 카페에서 옛 애인 리자의 목소리를 듣게 된 막스. 2년 전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떠났던 그녀였다. 그 이유라도 묻고 싶어 친구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찾아간 그가
만난 건 같은 이름의 다른 여자... 이제부터 영화는 같은 장면을 다른 시각에서 보여주면서 같은 사건이
각자에게 어떻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지그재그처럼 엇갈리는 다섯 명의 남녀...
막스는 결국 상상도 못했던 진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막스의 선택은? 그 선택이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감독은 오히려 그러한 선택을 통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당신도 별 수 없지 않을까?’라는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영화 내내 과거와 현재가 지나치게, 하지만 절묘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주인공들의 헤어스타일에 유의하지
않으면 지금 이야기가 현재의 것인지, 과거의 것인지를 놓치기 쉽다.
이 영화를 꼭 보도록 권하면서 그 재미를 빼앗아 버릴 것이 명백한 줄거리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싶다.
대부분의 영화소개 프로그램들이 저지르는 그런 실수를 나도 되풀이하면 안될테니까... 하지만, ‘좋은
영화니 일단 봐봐라’고만 하는 것 또한 무책임한 일이 될 터이니 나름대로 영화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장면만 언급해 볼까 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결혼반지를 고르는 주인공 막스에게 보석상의 주인이 세 가지 반지를 소개해 준다.
‘단순하면서도 당당하고 검소하지만 귀족적이며 품위가 있는 반지’, ‘아주 반짝거리지만 상처나기 쉬워
손대지 말고 바라만 봐야 하는 반지’ 그리고 ‘은은하며 보기에는 흐려 보이지만 빛에 비추면 그 광채가
대단해 별처럼 빛나는 반지’. 이 세 가지 반지는 막스가 만나는 세 여인을 상징하고 있다. 어느 반지가
어느 여인에 해당하는 것일까?
또 한가지... 영화 속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무대에 올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역시
커다란 복선의 하나란 것도 재미있다.
스산한 겨울이 되면 꼭 한번씩 다시 보고 싶어지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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