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omy Sunday..
Gloomy Sunday OST 'Andras & Ilona'
사랑과 죽음의 노래
- 영화 ‘글루미 썬데이(Gloomy Sunday)’를 보고...
“1936년 4월 30일. 프랑스 파리. 세계적인 레이 벤츄라 오케스트라의 콘서트.‘Gloomy Sunday’를
연주하던 단원들은 드럼 연주자의 권총자살을 시작으로 연주가 끝난 후 한 사람도 살아 남아 있지
않았다.”
“레코드로 발매된 지 8주만에 헝가리에서만 이 노래를 듣고 187명이 자살했다.”
“천재 작곡가 레조 세레스. 연인을 잃은 아픔으로 이 곡을 작곡하지만 1968년 겨울, 그 역시 이
노래를 들으며 고층빌딩에서 몸을 던지고 만다.”
마치 어둠이 깔린 라인강 위에서 뱃사공들에게 황홀한 죽음을 선사했던 그 옛날 로렐라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자살로 이끌었다는 ‘Gloomy Sunday’... 일명 ‘자살자의 찬가’라고도 불리운다는
그 노래... 도대체 어떤 노래이길래? 노래 자체에 대한 사연이 이렇듯 믿기 힘들도록 드라마틱하기에
영화보다 먼저 노래를 들어보고 싶었지만 영화의 O.S.T는 발매되지 않은 상태였고, 정말이지 많은
가수들이 부른 ‘Gloomy Sunday’ 중에서 내가 처음 들어볼 수 있었던 것은 Sarah Brightman이
부른 곡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는 전혀 우울하지 않았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 선배에게 강매
당하다시피 구독하고 있는 모 영화주간지의 부록으로 날아온 영화의 비매품 O.S.T에 실린 Heather Nova의
곡은 맑고 경쾌한 재즈버전(이 곡은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흐른다)으로 도무지 ‘우울’과는
거리가 멀다. 후에 들어본 원곡의 멜로디나 가사에서도 ‘죽음’을 떠올릴 수는 없다. 나의 한계일지
모르지만...
그럼 도대체 무엇이 그 많은 사람들을 자살로 내 몬 것일까?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갸우뚱~ 갸우뚱~...
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우리가 음악을 들으면서 슬픔과 기쁨을 느끼는 것은 그 음악 자체
(그 멜로디나 가사)가 슬프거나 기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음악을 듣기 전에 우린 이미 슬퍼하거나
기뻐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며(인식하던 못하던) 음악은 팽팽해진 우리의 감정을 터뜨려 주는 것일
뿐이다. 바람이 가득 든 풍선을 바늘로 찌르듯이...
그렇다면 ‘Gloomy Sunday’를 듣고 목숨을 버린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은 이미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건 무척 개인적인 사정이겠지만,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사정이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말이 되기도 할 터이다. 그러니까 그 자살자의 처지, 아니 적어도 그 당시
사회적 상황에 있지 않은 우리로서는 노래와 그에 얽힌 사연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럼, 과연 영화는...? 그 노래에 관한 이야기를 다뤘다는 영화 역시 시대적 상황을 뛰어넘지 못하고
우리에게 ‘저 사람들 왜 저래?’ 하는 의문부호만을 던지는 것은 아닐까?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Gloomy Sunday’와 자살에 관한 이야기는 영화의 소재, 더 심하게 말하면 BGM
(Back Ground Music)에 불과하다. 영화 밖(홍보나 신문기사)에서 노래와 관련한 이야기가 너무 강조되고
있다(물론 관심을 끌기 위해서겠지만). 영화를 보게 될 분들은 이 노래 자체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전혀
신경을 쓰지 마시길... 오히려 영화감상에 방해가 되니까... 그래서 영화엔 ‘Gloomy Sunday’란 제목보다
부제로 달려 있는 ‘A Song For Love And Death’란 제목이 더 어울릴 듯하다.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영화이지 ‘노래’에 관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너무나도 다정하고 행복하기에 오히려 불안한 일로나와 자보 앞에 피아니스트 안드라스가 나타나고 일로나는
자보에 대한 상냥한 애정과는 사뭇 다른 열정을 불태우게 된다. 일로나의 생일에 안드라스는 그녀를 위해
작곡한 ‘Gloomy Sunday’를 연주하고 일로나 역시 그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다. 그날 저녁 식당 손님의
하나였던 한스는 일로나에게 청혼을 하지만 거절당한다(당연하지~). 거절당한 슬픔으로 괴로워하던 한스는
다뉴브강에 몸을 던지고 그런 그를 자보가 구해낸다. 다음날 아침 안드라스와 밤을 보내고 온 일로나에게
자보는 말한다.
“당신을 잃느니 반쪽이라도 갖겠어”
이제 세사람은 특별한(우리들이 보기엔 너무나도) 사랑과 우정을 나누게 되지만 곧 전쟁이 시작되고
복수심에 가득찬 냉혈한 독일군 장교 한스가 돌아오게 되는데... (웬지 너무나 전형적인 영화스토리
소개인 듯... ^^;)
영화 속엔 세가지 사랑이 등장한다.
헌신적인 ‘배려’와 ‘이해’로 그녀를 사랑하는 자보. 그녀를 향한 사랑을 차마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초조함’과 ‘갈망’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만 보는 비운의 예술가 안드라스. 뚜렷한 목적의식과
강한 자부심에 가득 찬 채 자신을 거부하는 그녀를 ‘소유’하는데 집착하는 한스(그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사랑을 받은 일로나의 입장에서 보면(여기서 사족 한마디~ 대부분의 영화평들이 일로나가 ‘받은’
사랑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데, 그녀 역시 세가지 사랑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혼자서
하나?), 너무나도 다정하고 편안해서 언제라도 돌아가 지친 몸을 쉴 수 있을 것 같은 고향집 같은 자보의
사랑. 하지만 그와의 사랑에는 숨쉬기조차 힘들어지는 가슴 떨림이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뜨거움은
없다. 몸과 마음을 달뜨게 만드는 안드라스와의 사랑은 어딘지 불안하다. 돈과 권력을 가진 한스를 사랑한
적은 결코 없다. 그에게 몸을 허락한 것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했던 세 남자와 한 여자. 하지만 그들은 모두 결코 완벽하게 소유할 수
없었던 사랑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대한 깊은 상실감을 맛보았고 그 슬픔은 ‘Gloomy Sunday’의 선율에
의해 극대화된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글을 쓰면서 돌이켜 생각해 볼수록 많은 생각과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이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꼭 보시길... 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 ‘식스 센스(The Sixth Sense)’ 이후의
최고의 반전이라고 하면 좀 과장일까나? ^^;
또한 바라건대 언젠가 나의 일로나가 나타난다면 그녀는 자보와 같은 사랑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한다.
나의 사랑은 자보의 그것을 닮아 있을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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